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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ss the Universe

권기수 개인전

2025.04.05. ~ 2025.05.17.

권기수_총석-야범(叢石-夜泛)_220X110cm_회화_2015









<같은 구도, 다른 그림>


동아시아 수묵 전통의 구도법은 유장하고도 완강하다. 이 묵은 전통을 깨는 건 새가 제 발톱으로 제 집을 부수는 일처럼 어렵고, 이를 넘어서는 재창조는 더욱 버거운 수고와 과정을 동반 노정할 수밖에 없다. 오래 전 완고한 틀을 형성한 이 형식과 내용에 도전하는 작가는 기존 체계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작품 자체가 아예 도외시되기 십상이다. 분명한 건 재창조되지 못하는 전통은 답습에 머무르는 걸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권기수는 작가 활동을 하면서 전통 수묵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그 구도법을 빌려오거나 안견, 김정희, 김홍도, 정선 같은 이들의 작업을 끌어와서 자기 내용을 담아내는 작업을 해왔다. 전통 회화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은 금강산 총석정에서, 또는 풀향기 진한 바위 아래서 설령 생활이 궁색할지라도 낙도樂道를 구해왔다. 그들에게는 현실 저편에 돌아갈 수 있는 자연세계가 관념상 완성태로 존재했다. 이는 선학, 도학, 불학, 유학 따위가 혼융하면서 몇 천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내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투사하는 인물들을 신선, 고사高士, 도사 따위로 부른다. 오늘 현실은 그와 딴판으로 다르다.


선배들의 작업을 다시금 재창조하는 역사는 나라 안팎으로 두루 길다.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3일’(1814), 마네의 ‘막시밀리앙의 처형’(1868–69) 구도는 피카소의 ‘한국에서 학살 Massacre in Korea’(1951)로 재구성된다. 이는 같은 구도를 통해 끝나지 않는 학살 전통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다. 마네의 ‘올랭피아Olympia’(1863)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Venus of Urbino’(1538), 고야의 ‘마야 Maja’(1800),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Odalisque’(1814) 등이 응축, 해체되어 재창조된 작업이다. 우르비노에서 올랭피아에 이르는 과정에 여성의 몸은 전혀 다른 성질로 변화한다.


소상팔경瀟湘八景 구도법을 비롯하여, 안견의 사시팔경도 만춘 四時八景圖 晩春,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김홍도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적벽야범도赤壁夜泛圖과 오류귀장도五柳歸庄圖,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옥순봉도玉筍峯圖, 도담삼봉도島谭三峯圖, 정선의 통천문암도通川門岩圖 등을 재구성하고 있는 게 권기수의 이번 작품들이다. 오랜 기간 한국화 작업을 해오면서 작가는 이 선배들의 작업을 필시 거의 지문처럼 인식하게 되었을 터이다. 거기서 탈피하여 그는 기꺼이 다른 길을 선택하고 있다. 이 전시는 그 과정의 면모이자 고난에 찬 경로를 거쳐 내놓는 성과다.


어느 길목에선가 권기수는 수묵 전통을 곧대로 따르는 일을 내려놓고 작업 방향을 크게 선회한다. 우선 먹으로만 그려오던 수묵화들에 원색을 입혔다. 먹이 색이 되는 과정은 전통 붓을 꺾어버린 미술 기법으로만 보더라도 실로 쉽지 않은 시도로 보인다. 색을 얹은 수묵 전통 구도를 채우고 있는 건 붓의 유연한 놀림이 아니라 곧은 선들과 분도기로 그린 듯 한 둥근 원의 조형들이다. 회사후소繪事後素나 여백 따위에 굳이 집착하지도 않는다. 총석정 바위들은 오늘날 유리 빌딩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무념과 물아일체에 심취한 신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동구리‘가 무심히 떠돌고 있다. 전통 구도 안에서 동구리들은 배를 타거나 유리 바위 위에서 노닐며 자못 유희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익명의 표정은 현대인의 자화상과 다르지 않다. 요컨대 전통 수묵 구도의 현대화 작업이다. 따라서 이번 ’Across the Universe‘ 미음 프로젝트스페이스 전시는 전통 수묵화를 어떻게 재해석해서 새로운 회화 언어로 정립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볼 수 있는 논쟁 현장이자 감식안을 길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가령 세한도의 구도와 적요는 그대로인데 배경은 붉고 소나무 잣나무 대신 권기수가 즐겨 그리는 대나무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김정희는 청나라 풍 집에 사람을 그리지 않았는데 권기수는 인물 하나를 넣어 두었다. 작가의 분신 같은 조형 인격체 동구리다. 다른 작업들도 다르지 않다. 색과 선과 동구리를 통해 수묵 구도법은 이윽고 전혀 새로운 경지에 이르러 있다. 완상 대상이었던 전통 수묵화를 재구성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새로운 모색과 치열한 도전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집집마다 전깃불이 들어오고 기차가 달리면서 신선 고사 도사들은 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오늘 동구리는 콘크리트 유리 빌딩 사이에서 바야흐로 사유 중이다. 그는 누구인가. 너인가 나인가. 일상에 버젓이 존재하는 데도 은닉되어 있는 존재인가. 권기수가 펼쳐내고 있는 이 물질사회의 세계관(자연관)은 보는 이를 익숙하고도 낯선 곳으로 이끈다.


서마립(예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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